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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머나 교회처럼… (2019.12.01)
설교자     계강현 목사
예배명     주일 연합예배
성경본문     요한계시록 2:8-11
 
 
본문 내용
8 "서머나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9 나는 네가 당한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 너는 부요하다. 또 자칭 유대 사람이라는 자들에게서 네가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유대 사람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다.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악마가 너희를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감옥에다 집어넣으려고 한다.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할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여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주겠다.
11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Content


    

여러분, 어떤 교회가 큰 교회인가?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서머나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함께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권고만 있고 책망과 경고가 없는 교회다. 우리 교회도 서머나 교회처럼 됐으면 좋겠다. 우리가 보기에 외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에베소 교회를 향해 주님은 첫 사랑을 회복하라.’고 따끔한 책망을 하신다. 오늘 서머나 교회를 향한 평가에서도 주님은 우리와 생각이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왜냐하면 외적으로 서마나 교회는 초라한 교회였기 때문이다. v9a에 보면, ‘환난과 궁핍이 있는 교회였다. 여기 환난이란 말은 짓누르는 압박(스트레스)을 뜻하고, ‘궁핍이란 단어는 단순히 생계를 꾸려가는 데 어려움(πενα)’ 정도가 아니라, ‘너무 가난하여 전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상태(πτωχεα)’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서 서머나 교회는 오늘의 목회자나 성도들에게 그다지 매력적인 교회가 아니었단 얘기다. 오늘같이 기업화된 대형교회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버린 현실 속에, 서머나 교회는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는 변방인 셈이다. 요즘 목사나 교인들이 가난한 교회 좋아하나? 기왕 다닐 것, 큰 교회, 모든 것이 갖추어진 교회, 얻을 것이 많은 교회를 찾아 이리저리 옮긴다. 개척교회는 자꾸 문을 닫고 대형교회 몇 개만 너무 미어터져 수용이 불가능하니 건축비가 백억 대가 넘는 교회 건축을 무리해서 한다. 요즘 교회의 세태라면 서머나 교회는 그야말로 인기 하나도 없는 가난하고 작은 교회에 불과하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서머나 교회를 향해 v9b, “그런데 사실 너는 부요하다.”며 칭찬하신다. 이상하지 않나? 우리 일반상식과 정반대의 평가를 내리신 거다. 이해가 되는가? 주님의 관점과 우리와 관점이 뭐가 다른 건가?

 

1. 주님은 누가 진정한 부자인지 다 안다고 말씀하신다.

vv8-9, “서머나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9 나는 네가 당한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 너는 부요하다. 또 자칭 유대 사람이라는 자들에게서 네가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유대 사람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다.’” 주님이 두 번씩이나 말씀하시길, "내가 알고 있다." 주님이 알고 있다고 하신다.   

사실 문헌에 의하면, 당시 서머나 시는 굉장히 부유한 도시였다. 서머나는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56km 지점에 움푹 들어간 만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지금은 이름이 이즈미르(Izmir)로 바뀌었다. 화려한 항구도시에다가 헐무스 강과 연결되어 있어서 유역 모든 상품들이 서머나 시장으로 흘러들어 왔다. 이곳에는 특히 포도 무역이 성행하여 에베소와 마찬가지로 부유한 상업도시였다. 또한 아시아의 영광이라고 불린 아름다운 도시로, 주전 4세기경에 세워진 이 도시는 크고 넓은 거리들이 도시를 가로질러 곧장 뻗어있어서 주변 도시들이 도시계획 모델로 삼을 정도다. 가장 유명한 황금거리는 그 길 해안 쪽으로 시빌 신전이 있었고 그 길을 따라 곧장 가다가 보면 아폴로 신전,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고, 황금 길이 끝나는 언덕에 제우스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 서머나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서도 이교의 현란한 신전과 숭배의 모습들을 보았을 것이다. 운동 경기장과 거기에 필적할 만한 도서관도 있었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기념비는 유랑시인 호머의 출생지에 세워졌던 호머 기념비이다

또한 서머나는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도시였다. 수차례 걸친 민란 중에 이 도시는 항상 정의 편에 섰고, 그때마다 로마는 칭찬해 주었다. 서머나는 자유도시이고 순회 재판도시였다. 가이사 숭배에도 첫째가는 도시였다. 이 고대의 도시에 당시 25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인구의 거의 반수가 기독교인이었고, 훗날 서머나는 동방 정교회의 학문과 경건의 중심지가 될 정도로 기독교가 흥왕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 부유한 도시에 AD 90년경에 존재했던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으로 가난한 교회였다. 그것은 분명히 로마의 황제숭배와 관련이 있다. 당시 로마제국은 세계를 지배하는 각종 국가와 도시와 민족과 백성과 인종의 거대한 집합체였다. 로마는 어떻게 하면 이 거대한 대제국을 하나로 통치할 수 있느냐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거기에 대한 해결책 중에 하나가 황제숭배 강요였다. 1C말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황제숭배는 합법적이고 의무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했다. 일 년에 한 차례씩 로마의 전 시민들은 가이사 제단 앞에 꿇어 엎드려 향을 피우며 가이사가 나의 주님이십니다.(Caesar is my Lord.)’라고 고백해야만 했다. 그렇게 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적 의무를 수행했다는 증서를 로마총독으로부터 받았다. 이런 증서다. ‘황제의 대리자 세레노스와 헐마스는 그대가 제사 드리는 것을 목격했노라. 0000로마 시민이라면 누구나 이런 제사를 드리고 증서를 발급받아야만 했다.  

서머나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당연히 회당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 가운데 기독교로 개종하는 자들이 점점 많아지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위해 로마의 지방총독들에게 고자질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와 다른 부류이고, 로마가 추구하는 세계평화를 파괴하며 더욱이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자들이라.”고 고소했다. 기독교회를 말살시키기 위해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고소는 로마 지방총독들에게 받아들여졌고, 곧바로 기독교 핍박으로 이어졌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예배하는 기독교는 황제숭배를 강요하는 로마제국의 이교도요 반역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교회 핍박은 단지 감옥에 갇히거나 죽이는 육신적인 박해로 끝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감옥에 갇힌 기독교인들의 가산 약탈을 일삼았고, 그로 인해 기독교인들은 사회로부터의 냉대와 조롱과 직업적인 따돌림을 받게 되었다. 부유한 도시 서머나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가산을 대부분 빼앗기고 약탈당했다. 그로 인해 극도의 가난함을 면치 못했다. 히브리서 기자는 여러분은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또한 자기 소유를 빼앗기는 일이 있어도, 그보다 더 좋고 더 영구한 재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런 일을 기쁘게 당하였습니다.”(10:34)라고 초대교회 상황을 기록하였다. 결국 v9의 말씀은 그런 내용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거다. “나는 네가 당한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 너는 부요하다. 또 자칭 유대 사람이라는 자들에게서 네가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유대 사람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다.”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박해함으로 너무나 하나님의 뜻과 빗나갔기 때문에 사단의 무리라고 지적하신다.  

이런 정황 속에서 서머나 교회는 주님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려고 희생하다가 어려움을 당하고 손해를 보고 세상으로부터 냉대를 당하고 있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대표한다. 그것은 게으름에서 온 가난이 아니다. 게으름에서 온 가난에 대해서는 성경은 혹독하게 책망한다. 6:6, “게으른 사람아, 개미에게 가서, 그들이 사는 것을 살펴보고 지혜를 얻어라.” 하면서 vv9-11, “게으른 사람아, 언제까지 누워 있으려느냐? 언제 잠에서 깨어 일어나려느냐? 10 ‘조금만 더 자야지, 조금만 더 눈을 붙여야지, 조금만 더 팔을 베고 누워 있어야지.’하면, 11 네게 가난이 강도처럼 들이닥치고, 빈곤이 방패로 무장한 용사처럼 달려들 것이다.” 이런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서머나 교회는 신앙을 지키고 복음 전하려다 유대인의 고소와 로마로부터 압박과 가산의 약탈과 사회의 고립으로 인해 얻은 가난과 궁핍이었다. 주님은 그 서머나 교회를 향해 그런데 사실 너는 부요하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때 주님은 모습은 두 가지 이미지다. 첫째처음이며 마지막이신 주님이다. 우리는 그냥 쉽게 이 말을 읽지만 서머나 교인들은 이 말을 들으면 가슴이 뭉클했을 거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이사 숭배를 거부함으로 겪는 위험의 수렁 속에 늘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으로 늘 불안했다. 우리 인생이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이유는 다 끝을 모르기 때문이다. 내 인생이 시작은 했는데, 마지막을 모른다. 그러니 불안하다.

그런데 처음이며 마지막이신 역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가 내 인생의 시작과 마지막을 아신다. 두 번씩이나 "내가 너를 알고 있다"고 하신다. 어떤 상황 가운데도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격려의 모습이다. 이 주님의 모습은 서머나 교인들에게 엄청난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 말씀은 마치 사도바울이 8에서 피력했던 것과 똑 같다. vv35; 37-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37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 인생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시어 저 천국까지 인도하리라 믿는다. 그러니 여러분, 어떤 어려움에도 결코 두려워 마라.    

두 번째로 계시하신 주님의 이미지는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이라는 호칭이다. 여기 사용된 헬라어 동사는 현재시제가 아니라 부정과거 시제다. 헬라어 부정과거 시제가 뜻하는 바는 과거에 이미 일어난 사건, 행위가 완전히 끝난 것을 뜻한다. 그것은 당연히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의미한다. 서머나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늘 죽음의 위협 속에 살아야만 했다. 오늘도 사람들이 불안하고 초조한가? 죽을까봐 그렇다. 망할까봐 그렇다. 실패할까봐 그런다. 결국 죽는 게 두려운 거다. 그런데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하시고 우리의 모든 사정을 다 알고 계신다고 하신다. 우리는 그 부활의 주님을 믿기에 오늘 죽어도 사는 자이다. 이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가 되는가

처음과 마지막이 되시고 죽으셨다가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가 서머나 교인들의 환난과 궁핍을 그리고 유대인들로부터 비방을 받는 것도 알고 계시다는데, 뭐가 두렵나? 세상이 다 몰라줘도, 목사가 몰라줘도, 우리 주님이 알아주시면 되는 거다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 답답하고 컬컬하지만 대통령이 내 문제를 안다고만 해도 얼마나 위로가 되나? 그런데 역사의 주님이 아시면 되는 거다.

누가 가난한 자이고, 누가 부유한 자인가? 이 세상에서 잠시 돈 좀 많고, 집 좋은 거 있고, 차 좀 좋은 것 타면 부유한 잔가주님이 친히 인정하시는 교회는 크고 화려한 건물을 가진 곳도, 부자가 많이 있는 교회도, 학벌 좋은 사람만 모이는 교회도 아니라, 심령이 가난함으로 주님을 붙잡고 주님에게만 위로를 받고자 하는 교회다. 여러분, 세속적인 가치관을 버려라. 어떤 교회가 큰 교회인가?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비록 가난하고 빈곤했지만,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 희생하고 환난과 궁핍과 비방도 마다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서머나 교회가 진정 부유한 교회이고 좋은 교회다. 어떤 성도가 좋은 성도인가? 마찬가지가 아닐까?  

무디(D L Moody) 목사는 자기의 전도 강연을 들은 한 사람으로부터 이런 충고를 받은 일이 있었다. “당신의 강연은 문법적으로 틀리는 게 많습니다. 대중연설은 좀 삼가시는 것이 좋겠는데요.” 그는 학자의 관점에서 지적한 거다. 그러자 전도자 무디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미안합니다. 저는 그렇게 부족하지요. 그래서 말하는 것도 서투르고 많이 틀립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을 위해 쓰이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답니다. 당신의 그 좋은 지식과 통찰력과 판단력이 참 부럽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것들을 주님을 위해 어떻게 사용하시는지요?” 여러분, 아름다운 헌신의 기준은 지식이나 재물이나 능력의 많고 적음과 그 크기에 있지 않다. 내가 가진 것이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최선을 다해서 주님을 위해 사용하는 데 참된 충성, 아름다운 헌신이 있는 것이다.  

목장에서 복음 전하려고, 내게 있는 것으로 남을 섬길 때 고마움은 줄지 몰라도 감동은 없다. 그러나 나에게 없는 건강으로 남을 섬기고, 나에게 없는 물질로 남을 섬기고, 나에게 없는 시간으로 남을 섬길 때 감동을 주는 섬김을 할 수 있고, 주님이 그런 자를 부요하다고 인정하신다. 주님이 여러분의 환난과 궁핍을 다 아신다.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주님은 다 아신다. 누가 진정 부요한 자인지 다 아신다.

 

2.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시며 주님은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해주셨다.

vv10-11,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악마가 너희를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감옥에다 집어넣으려고 한다.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할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여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주겠다. 11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서머나 교회 교인들과 오늘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모든 환난과 궁핍을 완전히 제거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서머나 교인들에게 고난과 투옥과 연단을 받게 될 거라고 말씀하신다. 장차 악마가가 시험에 넘어뜨리려고 너희 중 몇 사람을 옥에 가둘 것이고 십일 동안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미리 말씀해 주신다. 여기 십일이란 정해진 기간 동안이라는 헬라어 표현이다. 이 모든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축도록 충성하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처음과 마지막이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11, 믿음 장을 보게 되면 기적이 일어나고 홍해를 건너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싸움에 이기기도 하고, 칼날을 피하기도 하고, 승리하는 믿음을 얘기한다. 이것은 믿음의 능력이다. 기도의 응답으로 나타나는 기적과 이사와 역사다. 믿음이 이런 식으로 분명히 역사한다. 오늘도 믿음으로 기도할 때 이런 능력을 맛본다

하지만, 11:35-39에는 믿음의 다른 면도 나온다. “믿음으로 여자들은 죽었다가 부활한 가족을 다시 맞이하였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더 좋은 부활의 삶을 얻고자 하여, 구태여 놓여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37 또 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질을 당하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학대를 받으면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았습니다. 38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만한 곳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다녔습니다. 39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아 훌륭한 사람이라는 평판은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예수 믿는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고문당하다가 죽은 다양한 얘기가 나온다. 시련과 궁핍과 환난과 학대와 유리함 등의 얘기가 나온다. 그걸 참고 견디고 하는 것 또한 믿음이란 얘기다.  

그러니까 믿음은 두 가지 면이 있다. 하나는 현재 나타나는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장래에 나타나는 믿음이다. 현재 나타나는 믿음은 병이 낫고, 불 속에서 건짐을 받는 기적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고난 받고 고문 받고 그러는 가운데서 장래의 상을 바라고 순교당하면서 믿음을 지키고 이기는 믿음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치면 안 된다. 예수 믿으면 모든 것이 척척 요술 방망이처럼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어린애 같은 믿음이다. 기도 응답이 안 오는 경우도 있고, 고난과 역경을 당할 수도, 주를 위해 수모를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또 반대로 그것만 강조해서 고난만 견디고 참는 것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거다. 하나님의 기도응답을 통해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길 거라는 기대를 갖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삶 가운데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조화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이런 서머나 교회를 향해 주님은 죽도록 충성하여라.”고 명령하셨다. 우리는 충성그러면, 쉽게 군대를 생각하고 교회에서는 직분을 생각하기 쉽다. 목사, 장로, 집사, 권사, 서리집사, 목자목녀, 팀장, 교사 등등. 그런 직분을 잘 수행하는 게 충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편 이런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물어 보실까? “너 세상에서 무슨 직업을 하면서 살다 왔냐?” 그거 물으실까? 아닐 것 같다. 그런 거 별로 관심 없으실 거 같다. 그렇다면 너 세상에서 교회 다닐 때 무슨 직분 맡아서 했냐? 목사냐? 장로냐? 집사냐? 권사냐? 목자목녀냐? 팀장이냐? 교사냐?” 그것 물어보실까? 그것도 아닐 것 같다. 하나님이 너 세상에 살면서 얼마나 충성했냐?” 물으실 거 같다.

그런데 여러분, 5:22에 나오는 충성이란 성령의 열매는 새번역에서 신실로 번역되어 있고, 25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에서도 개역개정에 착하고 충성된 종아를 새번역에서는 착하고 신실한 종아이렇게 번역했다. 그러니까 충성하다는 말은 신실하다는 뜻이고 그 뜻은 쉽게 말해서 약속을 잘 지킨다.’는 뜻이다. 한 번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서약한 것을 초지일관 지킨다는 의미다. 주님에게 달란트 받으면서 약속한 것을 잘 지킨다는 얘기다. 직장에 취업하면서 약속한 것을 잘 지키는 직원을 신실하다고 하실 것이다. 사업을 하면서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잘 지킬 때 신실하다고 하실 것이다. 목자목녀 팀장을 하면서 영혼구원, 제자 만들기에 집중할 때 신실하다고 할 것이다. 팀원과 교사를 할 때 한 해 동안, 눈이 오나 무더위 속에서나 초지일관 하나님과 교회와 서약한 것을 잘 지킬 때 그걸 신실하다고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 달란트 남긴 두 달란트 받은 종이나 다섯 달란트 남긴 다섯 달란트 받은 종에게 토씨 하나 안 틀리게 똑같이 칭찬을 하셨다. 열매가 많으냐? 적으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신실하냐? 신실하지 않냐가 중요하단 얘기다. 주님은 열매를 보시지 않고 우리가 매일의 삶에 신실하냐를 보신다. 약속을 잘 지키며 사느냐를 보신다.  

우리 사회에는 말을 바꾸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정치인들은 쉽게 공약을 묵살한다. 표만 된다면 신앙이나 사람들과의 약속은 물거품이 되는 게 정치세계다. 직장 다니는 사람들도 사장이나 상사가 있는 데서와 없는 데서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서약을 해놓고는 바쁘고 분주하다고 까맣게 잊고 산다. 서머나 교인들은 목숨의 위협 앞에, 감옥에 갇혀하는 상황 속에, 물질적 가난과 궁핍의 고통 아래, 신실함을 저버릴 만한 유혹 앞에 직면해 있다. 그들에게 주님은 죽도록 신실하라고 명령하신다. 끝까지 충성하기로 결단하고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주님은 능히 환경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주시고 신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끝까지 충성한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στφανος)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특별히 서머나에서는 충성스런 시공무원들에게 월계관을 씌어주었는데, 이 월계관을 스테파노스라 불렀다. 이것은 이웃들에게 섬김을 잘 수행한 자에게 주시는 상이다. 우리가 영혼 구원, 제자 만들어 신약교회를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의 참 부흥을 이루는 일에 신실하게 사역할 때 주어진 약속의 시간에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하고, 영혼을 섬길 때 신실한 종이라 칭찬하시며 생명의 면류관 주신다.   

또한 v11b에는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최종적인 약속을 하셨다. 그것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란 약속이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에게 충성한 자들은 이 땅위에서는 죽음을 맛볼지 몰라도 이후에는 영생을 맛보게 된다는 뜻이다. 불충성은 비록 죽지 않고 목숨을 부지할진 몰라도 종국에는 영혼의 죽음을 만날 것이다. 죽도록 충성한 자들은 영원히 살기 위해 죽는다. 그러나 불충성하고 자기 생명을 구하는 자는 죽기 위해 생명을 부지할 뿐이다.  

터키에 성지순례를 가면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방문하게 되는데, 모두 다 후대에 지어진 교회가 지진이나 핍박이나 전쟁으로 무너진 교회 터만 볼 수 있다. 그러나 후일에 서머나 교회를 감독했던 폴리갑(Polycap)의 순교를 기념하여 세운 폴리갑 기념 교회는 서머나(이즈미르) 시 한복판에 현재도 자리 잡고 있다. 터키라는 이슬람 국가에 기독교회가 우뚝 세워져 드러내서 오늘도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랍다. 그것은 요한의 제자 폴리갑 감독의 죽도록 충성한 순교의 신앙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 로마총독으로부터 가이사를 섬기겠느냐? 아니면 죽음을 택하겠느냐?” 배교를 강요받은 폴리갑 감독은 나는 86년간이나 그리스도를 섬겨왔소. 그분은 이때까지 한 번도 나를 저버리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찌 나의 왕을 저주하리요?” 당당히 주님을 택하고는 화형을 당해 순교했다. 불길이 그의 몸을 사를 때 그는 유명한 기도를 올렸다. “, 주님이시여! 오늘 이때까지 나를 귀히 보시니 웬 은혜입니까? 제가 지금 순교자의 반열에 서오니 그리스도의 잔에 받아 주시옵소서.” 폴리갑 감독은 마지막까지 죽도록 주님께 신실한 사랑의 고백을 드리며 주의 나라에 임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주님은 처음부터 마지막이요,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능력의 주님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 잠잠히 잊고 계신 것 같으나 나의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고 마음을 통찰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분이 우리의 복음을 위해 환난과 고난과 궁핍을 아시고 형편과 처지를 아신다. 그리고 부요한 자라고 평가하신다. 그러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죽도록 충성하여라.”고 부탁하신다.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끝까지 신실한 자로 살아 생명의 면류관 받고, 둘째 사망에 이르지 않는 복을 모두 받아 누리자. 아멘.


 

고난 가운데 희망인 그리스도 계강현 목사 2019.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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